[6·25전쟁 제70주년 특별기고]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6·25전쟁 제70주년 특별기고]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 기자명 장순휘 정치학박사
  • 입력 2020.07.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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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휘 박사

[더퍼블릭 = 장순휘 정치학박사] 올해는 6.25전쟁 발발 제70주년이 되는 해로서 남다른 감회가 드는 것은 최근 구국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대장이 향년 100세로 서거(逝去)하셨기 때문이다.

고인은 북한공산군의 불법남침에 맞서 셀 수도 없는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이제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정치모리배들에 의하여 친일 프레임에 시달린 점은 구국의 영웅에 대한 감히 있을 수 없는 결례(缺禮)라는 점을 역사의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6.25전쟁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정의되어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책임소재에 관한 진실이 벗어난 정의이기 때문에 ‘잘못 되었다’고 할 것이다. 민족사적 의미로 정확한 정의는 “김일성이라는 희대의 공산주의자가 해방 후 북조선을 해방구로 전쟁을 준비하여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의 권력욕을 숨긴 채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겠다는 망상에서 저지른 민족사 최악의 동족상잔이었다.”라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해방 후에 누구도 전쟁을 꿈꾼 지도자는 없었다는 점과 김일성(당시 38세)의 6.25전쟁 전후 전쟁지도(戰爭指導)의 행적을 추적하여 숨겨진 전쟁범죄적 진실을 밝혀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6.25전쟁이 김일성에 의하여 발생한 민족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참혹한 비극이었으며, 수백 만 인명의 살상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전쟁범죄(war crimes)’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 조차없이 전범 김일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유감스럽다.

평화통일 후 그자의 범죄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더라도 재론할 과제일 수도 있다.

추가적으로 6.25전쟁의 유념해야 할 관점은 국제법상 종전(cease fire)이 아니라 정전(armistice)이라는 현 상황이 언제라도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없이 북한의 기습으로 개전(open war)이 가능한 전쟁 중(on war)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북한이 다시는 전쟁을 안할 것이고 평화를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나 국가안보의 긴장을 스스로 해체하는 것은 자멸(自滅)의 길이니 항재전장(恒在戰場)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자세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한다.


▲ 6.25전쟁에서 싸워야했던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76세)과 북한 김일성(39세) 당시 모습


6.25전쟁의 요건과 원인으로 본 전쟁의 성격

‘전쟁의 요건’에 관하여 서상문 박사는 ①개전의 의지를 가진 국가지도자의 전쟁개시 명령의 유무, ②동원된 무장병력의 수가 정규군 연대급 이상의 유무, ③상대방의 무장행위가 2주 이상 충돌이 지속되고, 1명이상 사상자의 발생유무라고 주장하는 논점에서는 6.25전쟁은 전쟁의 요건이 된다. Melvin Small, David Singer의 주장은 ①전투의 지속성(sustained combat), ②조직화된 무장세력(국가)의 개입, ③12개월 기간 중 전투와 관련하여 최소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전투가 있어야 전쟁으로 인정한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전쟁의 원인’측면에서 ①국가지도자의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에 따른 상관성, ②대외무력행위를 국가 위세의 지도력 장악으로 보는 관점, ③사회적으로 국가사회가 처한 실정에 따른 ‘식민지 상태에서의 민족해방전선, 노예해방에 대한 남북전쟁, 분단극복을 위한 국가통일 전쟁 등’ 다양한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④국제사회측면에서는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글로벌 이니셔티브〔主導權〕 쟁탈전이 원인이 된다.

따라서 6.25전쟁은 이 모든 전쟁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동시 작용한 내전〔civil war〕과 국제전〔world war〕의 ‘복합형전쟁’이었다.

6.25전쟁과 전쟁지도자의 비교평가

‘전쟁지도(戰爭指導)’라는 용어는 부재적인 개념이나 전쟁리더십(war leadership),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ing),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을 함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쟁지도’라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 의미로써 통합된 전쟁수행역량과 기술을 의미하는 포괄적 개념으로서 전략(strategy)의 입안-실행-수정-새로운 계획입안-실행-수정의 지속적 반복되는 전쟁행위와 구상(thoughts and concept of action in war)인 것이다.

이에 따라 6.25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접근 방법은 전쟁지도자의 언행(의지, 구상, 발언, 정책, 전략, 결정, 지시, 조치, 수행 등)과 그 모든 것을 망라한 전쟁지도(conduct of war)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과 민주진영의 전쟁지도자 이승만, 트루먼, 맥아더의 전쟁지도를 비교평가는 것 자체가 매우 유의미하다.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

김일성은 해방 후 소련군의 후원으로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34세)로 정치지도자로서 정권(政權)을 잡았고,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 최고통수권자(37세)에 취임하여 군사지도자로서 군권(軍權)을 장악하였다.

그 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37세)에 등극하여 정치군사지도자로서 전쟁지도의 주체가 되었다.

김일성은 해방이전에 통일 조국에 대한 개인적인 구상을 했으며, 평화통일을 결코 믿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력수단을 통한 ‘조국통일구상’을 주장했다고 유성철(전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참가자/ 1992.4.12)의 회고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민족진영출신이 아닌 소련군에 편승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세력이 취약하여 ‘무력’에 의존했으며 남한에 대한 정치적 통일도 ‘무력지상주의적 관념’을 소유했다는 박갑동(『한국전쟁과 김일성』,1990)의 증언이 있다.

또한 김일성은 1946년 6월 전후로 지도급 인민군 군간부들에게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겠다는 군사력 건설사업에 관하여 중점적인 발언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러한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은 해방후 남북분단의 현실을 ‘자주적 민족해방’이라는 민족통일국가에 대한 망상(妄想)으로 형성되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을 염두에 둔 통일구상이었다.

김일성의 전쟁지도와 대소(對蘇)·대중(對中) 군사지원 외교행위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망상’이 전쟁지도로 실행된 것은 적극적인 대소(對蘇)군사지원 외교 행보였다.

김일성은 제1차 방소(1949.2.22.~3.24)에서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북·소회담(3월 5일, 7일, 14일)에서 대남 무력통일 구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준이 부족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즉각 개입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미·소간 얄타협정(1945.2)이 유효하다는 점을 들어 선제남침공격을 반대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략하라는 식의 전쟁지도 발언을 통해 김일성의 무력통일구상을 조건부 동의해주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조건부 동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반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 공산사회주의 혁명노선’과 일치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남침논의는 철저히 은폐했으며, 대북 군사지원 규모가 확대되는 결정적인 전쟁지도를 해준 것이다.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을 획득한 김일성은 귀국 후 본격적인 남침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제2차 방소(1950.3.30.~4.25)는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며, 김일성과 스탈린은 4월 10일 21시 10분부터 23시까지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미군의 한반도 철수(1949.6.30)로 변화했고, 중공의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공산화(共産化)’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이 비밀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염전분위기이고, 북한군이 신속히 전개하여 전쟁을 3일안에 승리로 끝낼 수 있다.

남조선 노동당 당원 20만 명이 남한에서 봉기를 하여 참여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했다.(김성호, 『조선전쟁의 비밀과 진실』, 2001년)

그리고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지도를 해주었는데 ①철저한 전쟁준비를 위해 부대를 추가적으로 창설할 것과 정예공격사단을 편성하고, 더 많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특히 남한의 공격을 유도해서 그것을 빌미로 반격하면서 전쟁을 확대하라는 구체적인 기만전술(欺瞞戰術)을 지도해주었고, 남침작전을 3단계로 구획하여 38도선에서 남해안까지 작전종심 350km를 한 달만에 점령하여 작전을 완료하라는 지도를 해주었다.

②위장평화전술로써 남한에 평화통일 제안을 하여 ‘전투와 군사행동’은 철저히 은폐하도록 지도했으며, ③공격작전은 속전속결이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④중공과의 군사지원을 연대하면서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으라는 조건부 승인을 하면서 “중공을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고, 소련은 직접 개입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통보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교사에 의한 김일성의 전쟁범죄라는 연관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은 공범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김일성은 대중(對中)군사지원 외교행보에도 집요한 노력을 하였다. 제1차 방중(1949.4.28.)에는 김일성을 대신하여 북한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이 방문하여 방소회담 결과를 보고했고,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남침전쟁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남침전쟁이 시기상조라는 불가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전쟁지도에 관하여 속전속결의 중요성과 지구전의 불리한 점을 언급했고, 중공군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모호한 언질을 주었으며,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3개 한인사단 중 2개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하도록 승인해 주었다.

제2차 방중(1950.5.15.)에서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5월 14일 스탈린의 특급전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대남전쟁 도발에 동의하였으며, 북한의 무력침공 기본구상을 지지하면서 전쟁지도를 해주었다.

마오쩌둥의 전쟁지도는 ①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중공은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 지원을 약속하였고, ②중공의 군사대응전략으로 동북 3성 근처 압록강변에 3개 군단을 배치하고, ③미군이 38도선을 넘어오지 않으면 관여하지 않겠지만 일단 38도선을 넘으면 반드시 인민지원군을 투입하겠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은 단순히 북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군사도발이 아니라 공산진영 소련과 중공의 군사적 지원 공모 하에서 자행된 '범죄전쟁(criminal war)'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김일성은 민족사에 비극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war criminal)'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 6.25전쟁을 공모했던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개전 초 전쟁지도 72시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3년차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당하여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여부를 놓고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몰렸다.

6.25전쟁은 그의 재임기간에 발생하여 정전으로 마감되었기에 전쟁지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시업적에 대하여 평가는 관심이 없거나 무시되었고, 그의 과오만을 부각(浮刻)하였다. 소위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개전 초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몰래 피난을 간 비겁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 폭파하여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고생을 시킨 무책임한 대통령으로 매도(罵倒)되는 점은 진실을 비켜간 과도한 평가절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승만의 3일, 72시간의 행적을 전쟁지도 차원에서 추적·고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개전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한 상황을 최초 경찰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09시 30분 경 창덕궁 비원에서 산책 중 10시경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 남침’상황을 보고받자 바로 경무대로 돌아왔다.

그 당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10시에 북한의 기습도발이 ‘전면공격’임을 판단했다고 한다. 이어서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남침 상황을 보고한 시간은 공식적으로 10시 30분으로 확인된다.

보고내용에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춘천근교에 접근한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불안해 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22쪽)에 증언되어있다.

당시 신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하니 참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경찰의 정보는 신 장관의 보고와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정확히 보고되면서 이 대통령은 전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전면전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은 후 국무회의(國務會議)의 소집을 지시했다. 11시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관했으나 특별한 대책없이 12시에 산회했고, 오후 2시에 다시 대통령 주재하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직전에 오전 11시 35분부터 13시까지 무초 주한 미대사를 경무대로 불러서 미측이 파악한 전황을 보고받고 논의하였다. 또한 무쵸대사와 회담을 마친 후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연결시켜서 장면(張勉) 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정일권 장군과 손원일 제독을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중용하여 전쟁지휘를 맡기고자하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장면 대사는 25일 01시(워싱턴시각)에 미 국무부를 방문하여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하여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요구했다”고 알려줌으로써 미군의 개입이 예상되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하와이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하여 귀국중인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최단시간 내 귀국하라고 지시를 했다.

6월 25일 09시 30분에 북한남침의 전쟁상황 보고받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전쟁이 돌입했다는 위기상황을 인식했고,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결심하는 ‘전쟁지도’의 구상이 본능적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났을 때부터 이 대통령의 전쟁지도가 시작되었다. 즉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지원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통보하였던 것이다.

개전 초 72시간동안 이승만대통령의 전쟁지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에 대하여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이에 무쵸 미대사는 15시에 국무장관에게 전문보고를 했으며, 이 전문보고는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탄약 10일 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라(to ship ten days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라는 지시로 실행되었다. 이 요청은 국군의 취약점을 대통령이 평소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민하였고,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육군 지휘부에 부담을 주는 계엄령 선포를 자제했던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초기 이 대통령의 과오로 부각되는 것은 대국민 홍보인데 25일 07시에 국방부에서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했고, 12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했다.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 해주 돌입’과 ‘국군 의정부 탈환 북진 중’이라는 오보(誤報)로 인하여 국민들이 심각한 혼란을 겪게 만든 것이었다. 이 실책은 이 대통령의 책임보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책임과 무능함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총력전을 이미 구상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런 대통령의 전쟁지도는 군과 경찰,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이 총동원된 전쟁으로 패망을 막았던 것이다.

넷째,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를 구상하였다. 즉 이 대통령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38도선이 무너진 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힘을 빌어 북진통일을 해야겠다는 전쟁지도의 궁극적 목표를 구상한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통해 미 극동사령부(FECOM)에서 F-51전투기를 요청하여 공군력을 보강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맥아더 장군은 즉각 지원을 지시하여 26일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를 발표하여 한국공군이 역사상 첫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여섯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 책임론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26일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에서 이 대통령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중략)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무섭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당시 미국에서 맥아더 소령과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로 두 사람의 오랜 교분이 맥아더 장군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지원의 배경도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에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전쟁지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6일 04시 30분 무쵸 미대사에게도 다시 전화를 걸어서 대포와 전투기를 추가 요청했다.

일곱째, 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사경력자 회의’를 26일 10시 소집하여 자문을 구했다. 군사경력자 회의에서는 전황을 보고받고 토의를 주관했으나 ‘서울사수’과 ‘한강방어선전투’가 맞서서 신 장관과 채총장의 주장대로 서울을 사수하기도 하고 폐회되었으나 이 결정은 국군에게 치명적인 전투력 와해가 되는 과오가 되었다.

서울사수론으로 후방에 있었던 육군 제2,3,5사단이 강북으로 투입되었다가 28일 02시 40분 한강대교가 조기 폭파되면서 퇴로가 막혀 중장비를 버리고 지리멸렬 철수하는 국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서울사수 실패는 국방부를 신뢰했던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라고 보는 것은 과장된 점이 있다.

여덟째, 제6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하여 대통령으로서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26일 11시에 국회본회의에 참석하여 초당적인 협조를 구하고, 유엔총회에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국회의 의결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본회의에서는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홉째, 미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설득한 구국의 군사외교를 통하여 긴급 군사원조를 와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27일 01시에 장면 주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면 대사는 26일 15시(워싱턴 시각)에 트루먼을 회동하여 이 대통령의 요청을 전달했고,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적인 한국 지원을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인 대상과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판단할 수 있었던 이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감각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국의 외교활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직후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침식을 거르면서 전쟁을 지도했던 전쟁지도는 매우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외교를 통하여 미국의 정치지도자 트루먼 대통령과 군사지도자 맥아더 장군을 설득하여 미국의 군사지원과 조기 참전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의 신(神)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는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개전 초 3일간 전쟁지도의 업적에서 탁월하였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군사지원을 극비리에 추진하여 전쟁을 준비한 군사외교적 행위와 체제내부의 전시 전환과 군부대 추가 창설 및 각 제대별 공격준비훈련 등 치밀한 전쟁지도는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전쟁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은 전쟁초기 전투력의 우세가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지속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착오를 범했으며, 철수한 미군의 조기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그리고 한국군을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무시한 점도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특히 춘천방면의 북한군 제2군단인 국군 제6사단의 용전분투로 돈좌된 상황을 보고받고 속전속결을 구상했던 제1단계 전쟁지도에 차질을 빚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전쟁준비단계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미군의 조기 개입으로 실패하기 시작하여, 이후 전쟁기간 중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된다.

 

더퍼블릭 / 장순휘 정치학박사 webmaster@thepub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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