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광개토태왕 – 4부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광개토태왕 – 4부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2.04.0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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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시대에 고구려는 북방, 중국, 그리고 동방이라는 동아시아의 삼핵(三核) 또는 삼극(三極) 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

▲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광개토태왕 – 4부 (22년 4월 8일자)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가 유튜브 ‘역사대학’에서 지난 4월 5일자 광개토태왕 3부에 이어, 4부 ‘광개토태왕 22년간 파죽지세로 전방위 영토확장’ 을 4월 8일자로 업데이트 하였다.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2022년 4월 8자 주요 내용]


광개토태왕, 그가 널리(廣) 열어간(開) 땅(土)은 논밭 같은 소극적인 개념의 토지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과 다양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거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제국이었다.

태왕이 추구한 거대한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어떤 정책을 추진했을까?

릉비문은 그가 즉위 년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64성과 1400 촌락을 공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큰 그림을 그려놓고, 관점을 갖고 파악하면 하나의 목표를 갖고 일관된 방식으로 추진했음이 드러난다.

첫째, 정치외교의 중핵(core)이다. 즉 세력들 간의 균형과 조정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급변해가는 국제질서의 구도와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었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 일은 엄청난 규모의 정복작전과 영토확장정책으로 나타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왕은 즉위한 첫 해인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고, 뒤이어 9월에는 북으로 진격하여 거란을 정벌한다. 릉비문에는 즉위 5년에 군마를 이끌고 비려(碑麗)를 토벌하고 3개 부족 6~700영을 공파한 다음에 수없이 많은 牛馬群羊을 노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려의 위치는 요하의 한 갈래인 시라무렌강의 상류지역으로 알려져 있다(서영수).

주력전선은 크게 봐서 북방과 남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북방정책은 어떠했을까?

오늘날의 우리는 ‘북방’이란 말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일대 전체와 중국의 북부인 화북지방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확하게 구분하면 만주는 북방이 아니라 동방이다. 우리의 역사권이었기 때문이다. 친정군은 요동을 넘어서 요서와 동몽골 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 강 상류유역까지 원정했다. 5500년 전 부터 홍산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기원 후에는 선비족 등 유목종족들이 거주하여 국가를 만들기도 하였던 곳이다.

요동 지역은 대분열시대로 접어든 중국을 압박하고 북방종족들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1차 방어선이며, 동시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연합하면서 양자를 번갈아 견제 또는 협공할 수 있는 절묘한 길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위상과 비중을 높이고,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굳혔다.

요동 지역은 경제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었다. 물류거점일 뿐 아니라 생산지이기도 한 경제 전략지구였다.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는 더욱 넓어지고, 해안가와 섬들에서는 어업이 활발하였고, 소금생산량도 급증하였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석재나 철.동.아연 등 에너지원인 지하자원이 풍부했다. 안시성이나 요동성 건안성 같은 지역은 철생산지였다. 또한 해양전략적인 가치도 컸다.

이렇게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북쪽으로는 내륙의 유목을 주로 하는 북방경제권과 교류하는 공간을 만들었고, 남쪽으로는 황해북부와 요동만, 발해만을 이용하는 해양물류망을 형성하였다. 당연히 원조선이 사용하였던 물류시스템을 복원하면서 경제력을 향상시켰다.

태왕은 북쪽으로도 진출하여 고구려가 옛 북부여 영토도 완전히 편입시켰다. 

 

큰나라(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경제.문화적으로도 중요하고 원향을 수복하여 부여정통성을 강화시킨다는 측면도 있었다. 초원이 펼쳐져 말 등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산동지방에 있는 남연에게 말을 수출했고, 장수왕은 송나라에 자백마를 보내기도 하고, 439년에 800여 필을 보냈다.

광개토태왕은 20년째 되는 411년에는 친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를 완전하게 복속시켰다. 이로서 두만강 하류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대까지 영향력을 끼쳤다.(서영수)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다. 각종 침엽수들이 울창해 목재가 풍부했고, 약재와 꿀.버섯.산삼 등 식용작물도 산출되었다. 동물들의 가죽은 비싼 사치품으로 취급되었다. 담비가죽은 읍루에서도 명산으로 취급됐다.

태왕이 이렇게 만주를 장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한 것은 원대한 꿈과 거대한 구상을 실현한 것이다. 고조선을 계승한 일종의 원토회복행위이며, 중원에 대한 야심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만든 것이다.

남방정책에서 태왕은 즉위하자마자 7월에 4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하여 예성강일대와 개경 주변의 석현(石峴) 등 10현을 점령하였다. 10월에는 백제의 최전방기지이고, 해군함대의 주력이 있었을 강화도 북부의 관미성을 20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즉위 2, 3, 4년에도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는 한편, 국경지역에 성들을 쌓아 방어를 철저히 했다. 안정적으로 강국을 유지하고, 중핵국가가 되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면 우선 남부전선을 안정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또한 질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제외교에서 중심부를 차지하려면 ‘외교통로의 장악과 관리’는 절대적인 가치와 필요성이 있었다. 때문에 태왕은 북방의 육지영토 뿐만 아니라 남방으로 진출해야 했고, 해양영토를 확대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남진정책의 강도와 방향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경기만을 장악하는 일이다. 한반도와 함께 환황해권의 역학관계가 결정되는 거점핵이었기 때문이다. 백제, 신라, 왜가 중국과 교섭하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므로 황해해상권을 장악하는 군사·외교상의 거점이고, 해외교역의 수출입항이었던 것이다.

태왕은 6년째 되던 396년에 보.기병을 활용하여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선제공격과 협공을 가하는 수륙양면작전을 벌였다. 대규모의 수군을 거느리고 경기만의 몇군데 지점으로 상륙한 후에 백제의 서울인 한성을 주공목표로 삼고, 그 외에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충청도 일부지역을 광범위하게 점령하여 58성 700여 촌을 탈취하였다.

태왕은 이어 신라를 목표로 삼았다. 인질로 잡혀왔던 실성이 왕이 되자 불평등외교를 강요하여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400년에는 백제 가야 왜의 공격을 받은 신라왕의 구원요청을 계기로 보병‧기병 5만을 신라지역을 향해 진격시켰다. 백제를 압박하면서 신라에 대한 종주권을 확실히 하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백제-왜라는 해양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남부의 외교중심축을, 신라를 통해 원천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것이었다. 

 

고구려군은 신라 영내에 주둔하면서 우월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어 백제·왜와의 관계를 빌미로 삼아 임나가라(경남 고령 일대)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남해에서 해양활동을 하고 일본열도의 왜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렇게 전쟁의 상황이 변해가면서 한민족 내부의 역학관계는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야라는 묘한 축(軸)으로 형성되었다

 

4년 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불리한 전세를 만회할 목적으로 태왕이 성공시킨 병신년의 수군작전을 모방하여 수군을 동원해서 황해도 지역인 대방계를 기습공격 하였다. 하지만 태왕의 친정군에 공격을 받고 궤멸당하였다. 그런데 당시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고구려 군대는 일본열도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태왕은 판갈이하는 국제질서의 변화와 미묘한 변화와 복잡한 시대상황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정책을 실천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국제질서의 지리적인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영토확장이 전술의 핵심임을 깨닫고 정비된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동서남북으로 수천리를 이동하면서 광범위한 정복활동을 전개하여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중부 이북의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거기에다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하였다. 명실 공히 해륙(海陸)국가의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동아시아 삼각축의 하나이면서 명실 공히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되어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관계 조정의 역할을 맡을 준비를 갖추었다.

결론적으로 태왕이 추진하고 성공을 거둔 전방위군사작전과 남진정책은 영토의 팽창, 인구의 획득이란 단순한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을 염두에 두고, 그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곧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광개토태왕시대에 고구려는 북방, 중국, 그리고 동방이라는 동아시아의 삼핵(三核) 또는 삼극(三極) 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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