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3편 (21년 12월 28일자)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3편 (21년 12월 28일자)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1.12.2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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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3국통일의 후유증, 내부갈등, 국제관계의 위기를 어떤 정책으로 해결하고 발전시켰을까?

▲ 21년 12월 28일자,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3편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21년 12월 28일자,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3편에서는 3국통일의 후유증, 내부갈등, 국제관계의 위기를 어떤 정책으로 해결하고 발전시켰을까? 의 내용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정책 3편, 영상 강좌 주요 내용]

신라는 통일을 실현한 후에 몇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은 분열되고 갈등이 심각해진 내부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야만 했다.

첫째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라의 관리, 군인 등으로 등용했다.

둘째는 불국사를 완성하고 석굴암을 조영하였다. 이 종교적인 사업은 삼국통일의 실현을 자축하고 선언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극보하고, 회한과 복수심 등을 신앙으로 풀어주는 해원의 행위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민족공동체 수립이 국가발전의 중요한 목표임을 선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신라는 아직 통일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는 망 백제유민들이 주도하여 신라공격을 추진하고, 당나라는 전쟁을 벌인 후의 감정이 남아있다. 또한 북쪽에서는 발해가 건국하여 바르게 성장했고, 일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라가 주도한 통일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우선 동아시아세계의 관점에서보면 중국에 대응할 수 있는 고구려가 멸망했으므로 이제는 동아시아가 唐나라 중심의 1극체제로 재편됐고, 이는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이 생성되는 계기가 됐다.

한민족사적인 관점에서도 문제점들이 적지 않았다. 다양성과 역동성을 생산하는 고구려 라는 공간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고구려체제 속에 편입되거나 영향권에 있었던 세력과 종족들이 이탈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요 금 원 청나라처럼 오히려 우리를 압박했다.

무엇보다도 일본국이 탄생하면서 우리와는 숙명적인 갈등관계가 되었다. 더불어 해륙국가인 고구려의 중핵조정역할을 상실하고, 만주 일대의 기마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불완전하게 계승됐다. 무엇보다도 재분단인 남북국시대가 됐다.

신라가 주도한 삼국통일은 정치적 통합이었으므로 문화의 통일, 경제의 통일, 사상의 통일은 실패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통일작업은 21세기 남북통일을 추진하는 우리에게 통일의 의미와 방식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준다.

역사의식, 국제질서의 인식, 국제환경의 대응방식 등이다. 또한 강력한 자주의식과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 등 과거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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