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 역사, 문화적 이해와 한민족 연관성–2부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 역사, 문화적 이해와 한민족 연관성–2부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2.02.0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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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적, 역사문화적 이해와 한민족연관성 2부(22년 1월 30일자)...스키타이 무대인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동아시아의 흉노 몽골, 투르크계 민족들

▲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 역사, 문화적 이해와 한민족 연관성–2부 (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가 유튜브 ‘역사대학’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 역사, 문화적 이해와 한민족 연관성’ 2부를 통해, 학문적 관점에서 역사학적 해설을 담아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을 분석해 본다.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2022년 1월 30일자 주요 내용]

인류의 역사에서 스키타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사실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청동기, 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황금문화도 발달했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기마민족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가공할 위력으로 흑해를 넘어 그리이스 식민도시들과 전투를 벌이거나 무역을 벌여 그리이스 문화와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스키타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이스인들이 부른 명칭이었다. 스키타이인들이 어디서 기원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크라이나 남쪽 일대에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서기 전 15세기 경 중앙아시아 북쪽의 초원 문화가 서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서기전 8~7세기경의 이들은 아리안 계통인 것은 분명하다.이들의 존재와 구체적인 생활상 등은 헤로도투스가 ‘역사’라는 책에서 기록됐다. 그는 이미 기원 전 7~6세기 경부터 흑해 북안에 세워진 그리이스 식민도시들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스타이이들은 거주하고 활동한 지역에 따라서 ‘농경스키타이’, ‘초원스키타이’, ‘산지스키타이’로 분류한다. 하지만 필자는 ‘해양스키타이’를 덧붙인다. 스키타이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태환경을 고려한다면 해양도 중요하다. 이들은 전투와 유목뿐 만 아니라 항해와 무역도 활발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알려진 것은 흑해를 이용해서 그리이스인들과 무역을 한 결과이었다. 따라서 해양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해서 활동한 집단들은 해양스키타이로 부를 필요가 있다.

스키타이 문화는 기마문화, 유목문화, 말문화, 청동문화, 황금문화, 고분문화라는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W자형의 성능이 우수한 활, 단검, 미늘갑옷 등으로 무장을 했고, 지배자들은 거대한 고분에 묻혔다. 이때 생전에 사용한 황금제품들을 비롯한 생활도구들, 심지어는 사람들을 함께 묻기도 했다. 이들의 우수하고 독특한 청동문화는 ‘스키토 시베리아’ 라는 문화양식이 만들어져 카프카스 산맥의 주변, 카스피해 일대, 알타이초원, 몽골초원, 동몽골, 만주, 한반도까지 연결됐다. 원조선의 유물들, 고구려의 예술품들, 그리고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 문화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됐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기마문화를 발전시킨 기마민들은 기원을 전부터 때때로 서쪽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기원 전 3세기에 강력한 제국을 완성했던 흉노는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남흉노는 항복하고, 북흉노는 본거지를 떠나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도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일대, 남서시베리아 일대까지 정착한 것은 분명하다.

4세기 무렵에 우크라이나 일대에 ‘훈’이라고 불린 집단들이 쳐들어와 370년에 동고트족을 멸망시켰다. 서고트족은 유럽의 각 지역으로 퍼지는 게르만의 이동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5세기 중반에는 훈족의 수장인 ‘아틸라’가 등장하여 동유럽과 남유럽,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중심부가 직접 위협당했던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갑작스러운 병사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우크라이나 지역은 분열된 투르크(돌궐)제국의 서돌궐 세력들이 서진하면서 투르크계인 하자르 칸국이 들어섰다.

9세기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공동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Rus, Ruch)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루스 칸국(830년)은 882년에 키에프 공국을 건설했다. 강력하고 문화를 발전시켰던 키에프 공국은 14세기 전반에 몽골족의 침공으로 불행을 겪게 됐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와 명장인 수부타이의 원정군은 키에프를 점령한 후에, 동유럽을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승리를 거듭하던 몽골군은 본국에서 대칸이 죽는 바람에 철군했다. 장례식과 대칸을 선출하는 대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 였다. 몽골이 유럽을 점령할 수있는 기회가 상실된 것이다.

이때 바투는 본국으로 회군하지 않고 러시아 지역에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약 240년 동안 러시아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고, 이어 킴차크 칸국의 분열후에 세워진 시비리 한국, 카잔 한국, 크림 한국, 아스트라한 한국 등 많은 한국(kan, khan)들에 의해 지배받는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라는 시대였다. 그 후 모스크바 공국을 주축으로 루스 세력들은 타타르 세력들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건국했다.

이 후 피터 대제(1682~1725)때 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정통성 문제, 정치권력 문제, 자원 문제, 타타르족의 지배권 등을 둘러싸고 갈등과 충돌을 벌였다. 러시아의 압박은 우크라이나인들로 하여금 강력한 민족의식을 갖게 만들고, 무력저항까지 벌이게 했다. 이후 쏘비에트 체제에서 독립된 후에도 두 지역, 두 민족 간에는 역사의 앙금이 계속됐고, 1991년 쏘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했다. 이후에도 흑해함대가 있는 크림반도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친 러시아계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2013년도부터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에서 무력을 동반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결국 크림반도는 러시아가 소유했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양국 간의 역사 문화, 지역 등 내부 문제와 함께 유럽의 동진과 나토(NATO)의 확장, 미국의 대 러시아정책 등과 연동하여 복잡해졌다. 때문에 지금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이다.

[해설 관련 서적-윤명철 교수 저서, ‘유라시아 세계의 이해와 활용’2020,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2020, ‘천산을 넘어 알타이로드를 찾아서’2020, ‘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2018 등]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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