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청와대 이전지의 ‘용산의 풍수적 이해’ – 2부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청와대 이전지의 ‘용산의 풍수적 이해’ – 2부

  • 기자명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 입력 2022.03.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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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선택은 정권의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생존이 걸린 문제 이므로 실용성, 국제 질서, 국가 미래를 고려해야...국민이 공동 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합의와 책임 의지의 점검이 우선 되어야...

▲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청와대 이전지의 ‘용산의 풍수적 이해’ –  2부 (22년 3월 23일자)(출처=유튜브)

[더퍼블릭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가 유튜브 ‘역사대학’에서 학자적인 관점에서 본,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청와대 이전지의 ‘용산의 풍수적 이해’ 2부에서는 서울 풍수 산자락의 한양과 한강 항구인 용산 비교를 역사학적으로 관점에서 새롭게 업데이트 하였다.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2022년 3월 23일자 주요 내용]

산풍수 도시 한양과 물풍수 항구 용산의 비교

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주체세력들은 천도가 불가피했다.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과 권력, 토지 및 자원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항구도시란?

‘강해(江海)도시’는 강과 바다의 체계와 특성, 그리고 일반적인 도시의 체계 등을 고려해서 필자가 만든 모델이다. 긴 강의 하구로서 효율성이 높은 바다가 이어지는 접점에 있는 ‘하항도시’와 해안가의 ‘해항도시’라는 2개의 성격을 동시에 가졌다.

강해도시는 첫째, 교통의 허브라는 유리함을 이용하여 중계업을 하고, 외국과 무역에 유리하다. 농산물과 수산물, 내륙의 임산물 광산물 등을 유리한 조건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둘째, 정보와 문화의 허브(hub) 역할에도 유리하다. 내륙에서는 차단된 대외적인 정보들과 국제정세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입수할 수 있다. 해양문화와 외국문화들도 여과없이 전달될 수 있다. 셋째, 문화의 수입처이면서 생산처이고, 동시에 배급처 기능도 하였다. 한강 중류와 하류 지역에서는 고대 중국 지역의 수입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강해도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안정된 항구 및 효율적인 부두를 구비해야 한다. 양질의 내항과 유기적으로 연결한 외항이 필수적이다.

둘째, 내륙수운을 발전시켜 육운과 바다로 확장된 해운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의 풍수 및 자연환경

백제는 500년(기원전 18년~475년) 동안 수도로 삼았고, 고구려와 신라도 중요시했다. 고려는 남경을 건설했고, 1356년(공민왕 5년)에는 천도 후보지로 삼았다. 실제로 한양에 성과 궁궐을 건설하는 시도까지 했다. 승려인 보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면 16개 나라가 조공을 바친다는 도참설을 공민왕에게 주장했다.

조선은 한양을 수도로 선택할 때 풍수지리설을 염두에 뒀다. 개경은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亡國)의 기지(基地)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의 영향으로 서둘렀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한양은 둘레를 내사(四)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과 외사(四)산(용마산·덕양산·관악산·북한산)이 겹으로 에워싸고, 물길이 안으로는 청계천, 밖으로는 동쪽에서 서쪽 바다로 흐르는 한강이 싸고돈다. 약간의 비보만 더하면 이론적, 수리적, 도형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신지배층인 성리학자들에게는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성리학적인 논리에 알맞아 이상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양은 경관이 수려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했다는 관념적인 찬사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외사산 내사산으로 인하여 적들의 공격에 비교적 안전한 환경이다. 하지만 수도를 선택하는 우선 순위는 백성의 안위와 생활을 보장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건들이다. 특히 현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필자가 생각한 한양의 개조계획

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반면에 국가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로서는 부족하다. 따라서 시설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 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

용산과 한강의 환경

서해안의 하구나 강해도시들은 편서풍지대여서 바람이 상류 방향으로 불기 때문에 조건이 매우 좋다. 한강은 해안에서 한성 백제의 수도권인 현재의 강동구 지역까지는 80km 정도이다. 조수의 영향은 서빙고까지 끼쳤다고 한다. 때문에 한강은 조운망이 발달했고, 시대를 막론하고 진과 포구 등이 있었다.

고려 말까지 용산강 일대는 10리의 길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개경 사람들이 놀러오는 유람지였다. 그런데 조선 초에 건너편인 염창부근의 모래 언덕이 붕괴되면서 물이 들어와 용산강으로 변했다. 당연히 남대문과 가까운 이 곳은 지방에서 온 세곡 수송선들이 집결하는 항구가 됐고, 더불어 모든 물류망의 거점이 되었다.

용산에 크고 견고한 부두 등을 건설하여 개경의‘벽란도’처럼 국제적인 항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초에 하륜이 제안했던 것처럼 도성까지 운하를 건설했다면 한양은 국제적인 수도가 될수 있었고, 조선과 조선사람들의 운명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잇점과 필요성을 인식해 일제도 남대문까지 운하건설을 에정했었다. 그 후 3백 여 년 지나면서 한강의 수위가 낮아졌고, 염창 모래언덕에 진흙이 쌓이면서 물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당연히 조운 선박들은 조금 하류인 마포와 서강 방면으로 후퇴했다. (최완기, 이현종 등)

만약 산기슭의 풍수도시인 한양과 한강이라는 천혜의 항강 부두인 용산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 서울 지역은 ‘수륙교통’과 ‘해륙교통’이 교차되면서 상호호환성을 지닌 강해도시이면서 안정성과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이상도시였을 것이다.

수도의 선택은 정권의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므로 실용성, 국제 질서, 국가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공동 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합의와 책임 의지의 점검이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고로 용산의 항구적, 개방적 잇점에 대한 의견으로 김두규 교수도 동일한 관점을 가졌다.

윤명철 교수 / ymc0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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